1857년에 태어난 밀튼 허쉬는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사도 많이 다니고,
안정적인 교육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세계 제 2차 대전을 겪으며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느 아이들 처럼 캔디를
좋아했던 밀튼은, 캔디를 사먹기 위해 심부름하고 받은 용돈을 아껴두었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 모두가 사랑하는
캔디를 만들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밀튼이 처음으로 작은 캔디 샵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캔디 만들기가 보는 것 만큼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밀튼이 캐러멜과 맛있는 초콜릿을 가지고 많은 실험을 하면 할 수록, 계속되는 실패와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계속되는 실패와 도전 속에서 마침내, 1886년 밀튼은 Lancaster 로 돌아가 캐러멜 회사를 차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늘 마음 속에 ‘누구든지 남에게서 바라는 데로 상대방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르던 밀튼 허쉬는 성공적인 삶을
누리면서도 그 정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유독이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밀튼 허쉬는 부인 캐서린 허쉬와 함께 고아들을 위한 집이자 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많은 재산을 내어놓았습니다. 1919년 11월 5일, 밀튼 허쉬와 캐서린 허쉬는 신탁증서에 사인을 했고, 허쉬
인더스트리얼 스쿨(1951년에 밀튼 허쉬 스쿨로 개명)을 세우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 다음해엔 첫 번째로 4명의 소년이 허쉬 인더스트리얼 스쿨에 등록했고, 밀튼 허쉬가 태어난 곳인 홈스테드에서 살고,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학교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학생 수도 늘어나게 되었고, 부인 캐서린 허쉬가 세상을 떠난 3년 후인
1918년에, 밀튼 허쉬는 개인재산 전부를 학교에 기부합니다.
"학교는 키티(부인 캐서린 허쉬의 애칭)의 아이디어였다. 만약 우리가 백명의 아이들을 도운 것이라면,
학교는 세워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2009년 한국에서는 밀튼 허쉬의 창업 이념을 따르고자, 발렌타인 기간동안 초콜릿의 수익금의 일부를 <굿네이버스>
재단을 통해 세계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으로 내어 놓으며, 허쉬러브앤젤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허쉬의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과 사랑은 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